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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3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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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돌아가는 세상 속에 있으면 개인의 인생도 산만해진다. 너무 많이 알면 사는 게 너무 복잡해지는 터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조의 끄트머리에 발을 걸치고 사는 방법을 택한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보다 내가 가진 주식이 폭락했다는 게 중요하며, 한나라당 경선 결과보다 회식 자리 장기자랑에 더 신경을 써야만 한다. 대부분은 그렇다. 송강호가 연기하는 인물들도 그렇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잘 몰라도, 어쨌든 살아가고 있다. 그게 삶이라는 듯.

하지만 송강호는 그 좁은 ‘보통사람’ 범주에서 판타지를 만든다. 그가 겪어온 캐릭터는 모두 고집이 세다. 바보 같다고 사람들이 비웃어도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영화 속 송강호는 절대 ‘정치’를 하지 않는다. 처세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 그저 나아간다. 비웃음은 어느새 감동으로 바뀐다. 동시에, 촌스러워서 무시당하던 옆집 아저씨가 알고 보니 ‘생활의 달인’급 인물이었다는 소박한 판타지가 피어오른다. 가진 것 없고 가방끈 짧고 외모가 평범해도 ‘소신’과 ‘끈기’만 있으면 소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거다.

<넘버 3>의 조필을 보라. ‘헝그리’의 영어철자는 몰라도 임춘애의 헝그리 정신은 안다. 자신이 ‘넘버 3’인지도 모르고  ‘너 존슨, 나 최영이야’라고 우겼다는 최영 장군의 무대포 원칙대로 후배들과 함께 나아갈 뿐이다.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은 이런 헝그리 정신을 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결과다. 머리보다 몸이 더 움직이지만, 80년대 최고 브레인인 후배 형사 앞에서 절대 기죽지 않는다. 그는 서류에 상관없이 오로지 ‘감’으로 용의자를 물색한다. 범인이 능력이 자신을 뛰어넘는지 아닌지도 판단 못한 채 그저 본능적으로 범인을 쫓는다. 영화 탓인지 타고난 것인지 어쨌든, 합리적인 시대와 담쌓고 살아왔던 80년대의 그림자가 송강호 안에 있다.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삼겹살에 청양고추 한입 베어 물면 그만인, 그런 한국인의 정서. 단순하지만 원초적인 그 정서 자체가 리얼리즘으로 이어진다. <괴물>의 강두도 박두만과 별반 다르지 않다. ‘노 바이러스’ 음모를 금세 알아챈 그는 눈칫밥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범인을 잡겠다는 목표와 딸이 살아있다는 믿음이 두 캐릭터를 움직인다. 목적달성의 과정에서 민폐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박두만과 강두는 ‘경쟁’을 원하는 게 아니라 자급자족으로 ‘구원’을 행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송강호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 <우아한 세계>와 <밀양> 캐릭터의 기원도 박두만에게 있다. 가족이나 연인을 위해 ‘희생’을 한다는 점이 박두만과 약간 다르지만 캐릭터들이 뿜어내는 호흡은 비슷하다. 욕망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존재하고, 논리보다 연륜과 본능이 먼저 작동한다. 낙관적이든 비관적이든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기 때문에 더 무모하게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 인구(우아한 세계)와 종찬(밀양)은 소시민의 초상을 천연덕스럽게 감싸 안으며 스크린 밖 동질의 관객을 위로한다. 네, 누구나 다 이렇게 살아요.

사실, 배우로서 송강호는 전혀 무모하지 않다. 연극배우였던 그는 선배였던 김의성 덕분에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출연했지만, 그건 ‘알바’에 불과했다. 이창동 감독과 <초록 물고기>를 찍으면서 영화 연기의 맛을 알게 됐다. 개성 있는 신인배우는 감독들 레이더에 포착되기 마련이다. <넘버 3>의 송능한 감독과 <조용한 가족>의 김지운 감독이 송강호의 동물적인 연기를 바로 알아봤고 연이어 그와 작업했다. 소시민의 징후는 <반칙왕>에서 개화했다. 한석규가 지적인 캐릭터로 국민배우가 되고 있을 때 송강호는 그 반대에 서 있었다. 그는 빽도 없고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사회적 약자의 편이었다. 송강호는 캐릭터를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연민까지 불어 넣었다. 이후 <공동경비구역 JSA>의 남북 드라마와 만나 연기는 더 단단해졌다. 그리고 한국영화계에서 실종됐던 한 단어가 돌아왔다. ‘페이소스’였다.

페이소스가 없는 영화에서 송강호는 종종 길을 잃곤 했다. 대박영화 <쉬리>를 그의 필모그라피에서 가장 안 쳐주는 이유는 그의 고집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규율에 잔뜩 얽혀있는 캐릭터는 송강호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남극일기>는 송강호식 마인드를 오히려 비판하는 영화였다. “할 수 없는 걸 하려하는” 맹목적인 고집은 남극원정의 비극을 촉발시켰다. 게다가 송강호를 비정하게 그려서인지 흥행성적도 비극적이었다. 그가 제일 자랑스러워하는 작품인 <복수는 나의 것>도 배우의 만족도는 높으나 손님이 안 든 경우다. 송강호의 아우라를 모두 지워버리려 했던 박찬욱 감독의 의도는 성공적이었으나 관객들은 웃기지 않는 송강호를 원치 않았다.

영화의 주인공은 감독을 닮아간다지만, 송강호의 캐릭터들은 송강호의 것이다. 송강호는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 삶을 산다. 그건 타인의 삶이 아니라, 송강호 삶의 연장이다. 그 삶을 지배하는 룰은 송강호가 만든다. 법도 도덕도 개인을 앞길을 속박하지 못한다. 송강호의 세계는 선과 악, 흑과 백보다 더 많은 잣대들이 노닐고 있다. 그래서 몇 감독들은 캐릭터 안으로 순결하게 빠져드는 송강호를 아끼며 그를 계속 진화시키려 한다. 김지운 감독이 찍고 있는 만주 웨스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송강호는 모터사이클을 몰고 다니는 이상한 놈을 연기 중이다. 극단적인 아이러니를 좋아하는 박찬욱 감독은 <박쥐>의 휴머니스트 흡혈귀 역으로 송강호를 찜해놨다.

눈에서 레이저빔이 발산되고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외모만으로 배우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배우는 얼굴이 아니라 연기로 레이저와 후광 효과를 내고, 얼굴도 작게 만든다. 캐릭터의 옷을 꼭 맞게 잘 챙겨 입는 송강호는 그런 배우다. 후배 연기자들은 ‘송강호 주니어’가 될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한 재능을 한탄하며 가슴을 쥐어뜯어야만 한다. 뒤를 이을 누군가가 나타날 때까지 송강호는 오래오래 관객의 곁을 지켜야 한다. 이건 그의 의무다.


PROUD 배우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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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1/02 01:17 | PERMALINK | EDIT/DEL | REPLY
비밀댓글 입니다
janis | 2008/01/03 11:51 | PERMALINK | EDIT/DEL | REPLY
편한 아파트 살다가 빌라촌으로 이사온 기분이로군요. 이웃의 많은 지도편달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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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3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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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용 화학조미료의 찝찝한 맛


<식객>에 나오는 멋진 대사 하나. "맛있는 음식의 수는 세상의 어머니들의 수와 같다." 한우가 석쇠에서 익어가도 식욕을 자극하는 하나였다. 시골에 파묻힌 천재 요리사 성찬이 진수를 위해 차려주는 된장찌개 밥상이다. 빛 좋은 된장을 푹 퍼서 뚝배기에 지글지글 끊이고 달래를 얹어 내는 된장찌개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 후로 영화의 요리는 내리막길이다. 조선시대 마지막 궁중요리사였던 '대령숙수'의 칼을 걸고 열리는 요리대회는 궁중요리라서 그런지 지극히 비현실적이었다. 게다가 요리를 만드는 정성스런 과정은 생략되고 보기 좋은 결과만 척 등장한다. 마치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맛에 상관없이 예쁘게만 만든 진부한 상차림 같다. 한식의 매력은 '외양'이 아니다. 좋은 재료에 여러 가지 조리법을 적용해 푸짐하게 차려내는 게 바로 한식의 훌륭한 점이다. <식객>의 만듦새도 영화 속 성의 없는 조리과정과 비슷하다. 과정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든 감동으로 마무리하겠다는 상업적 욕심만 보인다. 악역으로 등장하는 봉주의 상업주의가 나쁜 짓이라고 욕하면서 영화도 비슷한 과정을 따른다.

내가 기억하는 원작만화 <식객>은 한국의 좋은 식재료를 찾아 만든 멋진 요리를 찾는 내용이었다. 한국음식 요리사들뿐만 아니라 좋은 재료를 생산하기 위한 1차산업 종사자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그런데 영화 <식객>에는 여러 사람 손을 거쳐 만들어낸 요리를 찬양하는 존경심이 없다. 착한 천재와 악한 2류의 대결만 흥미롭게 부각되면 그만이다. 좋은 한우가 어떤 역사적 배경 아래서 탄생될 수 있는지, 좋은 복어는 어떻게 잡을 수 있는지, 그리고 좋은 재료를 이용한 요리가 어떻게 제2의 생명을 얻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빠지고 결과만 내보여주며 요리사의 '능력'을 극찬하기에 바쁘다. 게다가 플래시백을 남발하며 강조하는 민족주의 때문에 소화불량에 걸릴 지경이다. 요리의 맛을 두고 승부하는 게 애매하니, 애국심 적은 쪽에게 점수를 덜 주겠다는 심보. 왕이 울고 간 육개장의 상징적 가치를 해부하며 최고의 요리라 들이댄다. <식객>엔 음식을 맛이 아니라 프로파간다로 이용하겠다는 요상한 배타주의가 깔려있다.


괜한 감동을 주기 위해 삼천포로 빠지는 얄팍한 전략도 있다. 최고의 숯을 찾아 나서는 에피소드에서 갑자기 숯쟁이의 끼어든다. 좋은 숯에 대한 상식이나, 숲의 대한 역사는 사라지고 가슴 절절한 숯쟁이의 사연만 남았다. 그럼, 사연 없는 사람은 좋은 숯을 못 만드나? 성의 없는 만듦새는 리얼리티도 떨어뜨린다. 요리대결 사이 짧은 시간 동안 사형수의 사연을 밝혀내고, 숯도 만들고, 결국 그의 장례식까지 참여한다. 감동을 주기 위해 억지로 끌고 온 설정이 아닌가. 성찬이 동생 같던 한우를 잡는 장면도 그렇다.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할게”라며 온갖 청승은 다 떨고 아무런 감흥 없는 해체 작업만 하고 끝난다. 더군다나 이 대결에선 봉주가 이긴다(결국 상처 때문에 지지만). 괜히 슬퍼했던 관객만 머쓱하다. <식객>은 대결 과제에 따라 이런 식으로 에피소드를 계속 나열한다. 그런데 에피소드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거대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순간의 깜짝쇼를 위한 소모품으로 활용되고 만다. 코스 요리에 비유한다면 조화가 엉망이다. 부분이 모여 전체가 돼야지, 부분들이 각각 튀면서 전체의 설정을 애매하게 만들면 곤란하다.


<식객>의 만듦새는 한 시즌 인기 끌다 사라지는 유행 음식과 비슷하다. 화학조미료를 팍팍 뿌려서 미각을 잃게 한 다음, 자극적인 맛만 기억에 남게 만드는 방식이다. 거기다 '전통요리'라며 과장 포장을 해서 한국인이라면 꼭 먹어야한다는 식으로 강조한다. 이게 도대체 올바른 음식 장사인 걸까? 궁중요리가 아니라 앞에 나온 멋진 대사가 아깝지 않게 어머니의 음식 발굴에만 노력해도 <식객>은 꽤 값진 영화가 됐을 것이다. 고급음식만 선호하는 꼰대 평론가들을 위한 요리가 아니라, 창조 자체를 즐기는 제이미 올리버 같은 신세대 요리사가 등장해 독창적인 레시피를 내놓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일단 영화의 주인공인 성찬은 요리를 즐기며 하지 않는다. 전통을 이어야한다는 강박관념만 있다. 이건 마치 꼰대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하는 잔소리 같기도 하다. 개성보다 교과서가 중요하다는 거다. <식객>은 소재가 신선하다는 이유로 흥행은 됐지만, 생각할수록 맛없는 영화다. 감독도 극중 성찬처럼 강박관념만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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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3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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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과 달인 사이


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을 보고 있노라면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몇 십 년 동안 한 우물만 파면 '진기명기 쇼'에 버금가는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희망이 우선이다. 이어지는 절망. 몇 푼 벌어보자고 뛰어들었던 직업전선에서 생존하기 위해 '기계'가 될 수밖에 없었던 빽 없는 아빠, 엄마의 모습이 가슴에 와서 박힌다. 그러니까 <생활의 달인>에 등장하는 분들은 고색창연한 의지를 가지고 한 길 걸어온 '장인'이 아니다. '빨리빨리' 돌아가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달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부터 장인 대신 달인이 만연한다는 사실이 한국 사회의 슬픈 징후로 느껴졌다. 정확한 깨달음의 시점은 <M>을 두 번 보고 온갖 리뷰를 떠들어본 직후다.

영화관계자들은 이명세 감독을 두고 '장인'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장인은 '고집쟁이'의 완화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M>은 이명세 감독의 고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그러나 냉소적인 사랑 담론을 현실에서 체화하며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순수'는 비웃음의 대상이다.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내 인생의 착한 시절도 있었다며 내심 흐뭇해하면서도, 유치하고 우습다며 애써 기억을 접는다. {내 기억 속에 끊겨진 필름 한 조각}을 굳이 찾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설정뿐만 아니라 <M>의 영화 구성방식은 더 고집스럽다. 친절하게 떠먹여줘도 모자를 판에 별 영양가도 없는 '떡밥'을 계속 던지다가, 나중에는 추리물이 아니고 멜로라며 뒤통수를 친다! 이미지를 보고 즐기라는데 '아침 드라마'급 이미지만 보고 살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어둠을 이용한 고차원 편집에 눈뜰 리가 없잖아. 게다가 명료한 것 좋아하는 논술세대는 'A는 A다'라는 답을 원하지, 'A는 A일까?'라는 헷갈리는 철학적 질문이 귀찮다. 아, 영화 해석도 5지 선다형으로 만들어달라니깐!

<M>처럼 이글도 상당히 헷갈리는 전개가 되어버렸지만, 사실 나는 <M>을 만든 이명세 장인을 욕하려는 게 아니다.(급반전!) 영화를 소개할 때 무조건 '장르'부터 들이미는 게 대세인 지금, 영화 장인보다는 영화 달인만 가득하다. 시대의 흐름에 빨리 적응해야 돈 모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미덕인 사회에서 장인은 불필요한 존재다. 달인이라면 <M>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오픈 유어 아이즈>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바닐라 스카이>를 보라. 상업영화에선 장르 배열이 먼저고 미학은 부차적 문제다. <M>을 본격적인 스릴러로 바꿔놓는다면 주인공의 기억상실 사이로 플래시백 인서트 컷이 날뛰면서 끝까지 미미가 유령임을 발설하면 안 된다. 문제는 이런 장르 복제가 재미를 제외하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다(적어도 재미는 있을 거라는 관객의 원성이 들려온다). 그래서 장인과 달인은 다르다. 오래 일을 하면 머리가 아주 나쁘지 않는 한(!) 일의 속도는 빨라지지만, 그 와중에 깨달음을 얻고 순결한 자세로 득도해 가는 건 쉽지 않다. 이명세 감독은 그런 장인 정신을 쫓는 흔치 않은 사람이다. 때문에 존재만으로도 빛나는 깨달음을 준다. 강조하자면, <M>의 잘못은 만듦새가 아니다. 장인 영화를 달인 영화처럼 포장해서 안 볼 사람까지 보도록 부추겨놓고 책임지지 않았다는 게 차라리 잘못이다. 오래된 메밀국수집이 리뉴얼 후에 특별 메뉴를 만들더라도, 광범위한 패스트푸드의 인기를 따라잡긴 힘든 거다.

우리는 모든 정보를 뒤섞어 무의식적으로 '생활의 달인'이 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촌스럽던 과거를 빨리 잊어야 한다. 낡은 건물을 부수고 뉴욕 스타일로 다시 짓는다. 매 계절마다 새로운 옷도 필요하다. 스스로 뒤떨어진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자나 깨나 노력한다. 뛰어난 적응력은 바람직한 가치다. 요령이 좋은 달인은 효율성을 높인다. 하지만 몰아치는 상황 속에서 '진짜 나'를 잊어버리진 않았는지 한번쯤 정신머리를 챙겨 볼 필요가 있다. 이명세란 장인의 존재가, 그리고 그가 만든 영화 <M>이 지금 던져주는 화두는 바로 이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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